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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님한에서의 교회 재건 조회수 : 3476
  작성자 : 현대교회 작성일 : 2003-06-22
남한에 있는 교회들은 미군의 진주 때문에 완전한 신앙의 자유를 누렸다. 비록 일제가 일제의 강제에 의해서 시작된 것이지만 합동된 교파를 그대로 유지하려는 움직임도 있었다. 1945년 9월8일 새문안교회에서는 감리교의 변홍규 이규갑 박연서 그리고 장로교의 김관식 송창근 김영주 등의 목사가 모여서 그 존속을 의논하였다. 이것은 북한지역에서 진행되던 교회재건 운동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여기 교권과 정치적 야욕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나 형식적으로나마 한국교회의 일치를 위한 노력이 시도되었다는 것은 큰 가치를 지닌 것이었다. 그러나 감리교회의 퇴징과 각 교파의 자파환원이 그 이상을 깨뜨리고 말았다. 이렇게 해서 교단통합을 계속 유지했던 일본과는 달리 교파의 난립이 불가피해진 것이다.

감리교회는 교단대회에서 퇴장한 후 동대문교회에서 재건중앙위원회를 개최하고 이규갑목사을 위원장으로 추대하여 재건의 기치를 들었다. 그러나 그 진행은 여의치 않았다. 그 과격성 때문에 여기에 호응하는 교회가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1946년 감리교신학교를 재건하고, 변홍규목사가 교장으로 취임했을 때에도 교회의 반응은 냉담하기만 했고, 여기에 반대하는 이들은 수표교교회에서 기독교 조선감리교회 부흥 신도대회를 열고, 별도의 조직을 하였다.
성결교는 해방 이후 서울에서 재건총회를 개최하고, 신학교 개교와 교단지의 복간, 부흥대책들을 수립하였으며, 교단명칭도 “조선 예수교 동양선교회 성결교회”에서 “대한성결교회”로 개칭하였다.

구세군도 재건에 정진하였다. 처음에는 연합교회에 존속하는 문제로 의견의 충돌이 있어 재건에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지만, 결국 의견의 일치를 보고 교단을 조직하였다.
침례교 역시 연합교회 존속을 거론한 일이 있었지만 충남 부여에서 교단 재건을 합의하고 침례교의 독자적 유지를 결의하였다. 그런데 이 교회는 1946년 9월에 회집한 회의에서 몇가지 제로를 혁신하고 교단의 명칭도 바꾸었는데, “동아기독교”를 “대한기독교 침례회”라 하였다.
그러나 장로교회의 문제는 수월치가 않았다. 가장 문제가 심각하게 나타난 것은 신학교 문제였는데, 가장 먼저 문제가 된 것은 교려신학교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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