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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장로교회의 분열 조회수 : 4375
  작성자 : 현대교회 작성일 : 2003-06-29
장로교회는 신학교 문제가 아주 복잡했다. 우선 고려신학교 문제가 술렁대기 시작했다. 한상동목사가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옥에 갇혔다가 해방과 함께 출옥한 “출옥성도”로서 부산에 와서 역시 같은 출옥성도인 경남노회장 주남선 목사와 손을 잡고 교회의 정화와 재건을 추진하면서 문제는 커 갔다. 고려신학교는 교회의 재건과 정결의 경로가 신학교육의 정당한 진전이 없이 성립되기 어렵다 해서 박윤선 목사와 의논한 끝에 부산에 세우기로 한 기관이다. 그 교장에는 만주에 있던 박형룡 박사를 모시기로 하였다.

그런데 박 박사의 귀국이 늦어지면서 박윤선 목사가 교장으로 취임하고 1946년 9월 20일 개교했을 때 그의 신학교육의 배경과 신사참배의 반대의 연결로 해서 자연히 메첸(J.S Machen)파 선교사들과의 제휴가 성립되었다. 그러나 그 해 12월에 진주에서 모인 노회에서는 고려신학교의 인가 취소론이 대두되었다. 사태가 잘못된 방향으로 진전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자 한상동목사는 노회로부터 탈퇴를 결심하였다. 여기에 당황한 것은 경남노회였다. 그리고 결국은 출옥성도들의 요구를 받아들임으로 문제는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메첸파 선교사들의 비타협적인 독선과 한상동목사 계열의 철저한 재건 원칙의 주장은 출옥성도를 중심으로 경남법통노회를 조직하고 갈라져나가서 고신파를 형성하였다. 이렇게 하여 출옥성도를 중심으로 한 장로교 고신파가 탄생히게 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조선신학교의 재건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하게 되었다. 김재준목사는 자유주의적 자신의 신학사상을 대담하게 가르치면서 보수신앙에 정면으로 도전하게 되었다. 이처럼 당돌한 새로운 신학적 방법론은 한국교회에 충격과 반발을 일으켰다. 결국 조선신학교 학생 51명의 연명으로 총회에 진정서를 제출하였다. 총회는 우여곡절 끝에 김재준 목사가 한국교회를 능욕하는 신학을 가르친다고 결정하고 김목사를 1년간 해외에서 유학하도록 하는 결의안을 채택하였다. 그러나 김재준목사는 이 일에 응하지 않았다. 그리고 결국 1953년 6월에 한국신학대학을 설립하였다. 기독교장로회가 분리된 것이다. 결국 신학방법의 차이 때문에 교회가 분열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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