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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한국의 가톨릭교회 조회수 : 2262
  작성자 : 박행신 작성일 : 2003-02-10
1636년 국호를 청이라 고친 만주의 여진족이 10만 대군을 이끌고 조선에 쳐들어 왔다. 병자호란이 일어난 것이다. 왜란이 끝난 지 불과 40년만의 일이었다. 인조는 남한 산성에서 오랑캐라고 깔보던 청 태종 앞에서 이마가 깨지도록 아홉 번 절하고 소현세자를 비롯하여 많은 충신들을 청에 볼모로 보냈다. 북경에 머물던 소현세자는 그곳의 주교였던 아담 샬과 친교를 맺게 된다. 소현세자는 서양의 과학과 천주학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으나, 귀국한지 70일만에 학질에 걸려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게 된다. 이로서 기독교는 물론이고, 서구의 발달한 과학마저도 전파되지 못하게 되고 말았다.

두 번의 무서운 전란을 겪은 조선은 역사의 격랑을 헤쳐 나가기 위해서는 실용적인 학문이 필요성함을 깨닫게 되었고, 그런 배경에서 실학이 발전하게 되었다. 실학자들은 서양의 문물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는데, 그런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기독교와 접촉하게 되었다.
특히 실학파의 선구자인 이수광이나 이익, 이성호 등은 천주교를 연구하여 책을 쓰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천주교를 학문적으로 연구하는 범주에서 크게 벗어 나지 못했다.

그러던 중 이승훈이 사신의 일행으로 북경에 이르렀다가 그곳에서 선교사들과 여러 차례 토론을 하는 과정에서 기독교의 가르침과 도덕적 교훈이 이끌려 신앙을 고백하게 되었고, 공개적으로 세례를 받았다. 이로서 그는 한국 최초의 세례자가 된 것이다. 1784년 2월의 일이었다. 당시 북경에 머물던 선교사들은 아직 선교사가 한 번도 들어가 보지 못한 미지의 땅에서 온 젊은이가 신앙을 고백하고 세례를 받은 일에 대해서 기적이라고 경탄하였다.

한국 최초의 세례교인으로서 선교에 의해서가 아니라 구도에 의해서 신자가 된 이승훈은 중생한 사람답게 당당하게 성경 및 서양의 과학 책을 들고 귀국하였고, 불타는 열정으로 복음을 전하였다. 그가 한양 근교에서 선교를 시작한지 4년이 지난 후에는 신도의 수가 4천을 헤아릴 정도가 되었다고 한다. 그는 성직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벽 등에게 세례를 베풀었고, 이벽은 정약용, 정약전, 정약종, 그리고 권일신, 권철신 형제를 전도하였다. 이들은 김법우의 집에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하였는데, 명동성당의 모체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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