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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조선의 어머니로 살았던 대부인. 스크랜튼 ① 조회수 : 3155
  작성자 : 현대교회 작성일 : 2006-07-16
조선의 어머니로 살았던 대부인. 스크랜튼 Mary F Scranton

조선 사람들은 미국 감리교회의 여선교사였던 메리 스크랜튼 여사를 대부인(大夫人)이라고 불렀다. 그녀가 조선의 많은 사람들에게 어머니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스크랜튼 대부인은 미국 메사추세츠 주 벨처타운에서 출생했다. 결혼하기 전의 이름은 메리 벤튼이었는데, 벤튼 가문은 뉴잉글랜드의 전통 있는 감리교 가문이었다. 그의 아버지와 남동생, 그리고 조카도 미국 감리교회 뉴잉글랜드연회의 목사였다.

신앙의 가문에서 출생한 스크랜턴은 1855년 코네티컷 주 뉴헤븐의 제조업자인 윌리엄 스크랜턴과 결혼하였고, 1856년 5월 29일 외아들인 윌리엄 벤튼 스크랜턴을 낳았다. 그녀는 나이 40세에 남편과 사별한 후 미감리회 해외여선교회 연회의 서기로 봉직하기도 하였다.
그 후 오하이오 주 클리블랜드에서 생활하던 중 한국 선교사로 가기로 결심하고, 1884년 10월 미감리회 해외여선교회에서 한국으로 파송된 첫 번째 여선교사가 되었다. 아들 내외와 두 살 된 손녀, 아펜젤러 가족 일행과 함께 1885년 2월 3일 미국 샌프란시스코를 출발해 2월 27일 일본 요코하마에 도착하였다. 한국의 국내 사정으로 인해 잠시 일본에 머문 후 6월 20일 내한하였다.

내한하여 봉건제도에 얽매여 있는 여성들을 위한 교육이 시급함을 절감하고 한국 여성의 전통적 미덕과 품성 위에 선진문화를 받아들여 개화시키고, 기독교 정신에 입각한 인생관을 가질 수 있게 하는 학교를 설립하기로 결심한 스크랜턴 대부인은 1885년 10월 정동에 부지를 마련하고, 한국 최초의 여성학교를 준비하였다.

1886년 2월부터 건축을 시작하였으며 5월경부터 학생을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최초의 학생은 ‘김씨 부인’으로 알려진 정부 관리의 첩이었는데, 석 달이 못되어 떠나갔다. 한 달 늦게 "별단이"라는 학생이 찾아왔으니 그가 실질적으로 첫 학생이다. 그 해 11월에 완공한 한옥건물은 여선교사들의 거처이자 한국인 여성들을 대상으로 선교할 구심점이 되었다. 1887년 명성황후는 스크랜턴 대부인의 교육사업을 인정하고, 정부가 승인한다는 의미에서 "이화학당"이라는 명칭의 편액을 하사하였다.

이화학당을 통한 그의 교육사업은 불평등과 삶의 억압 속에 살던 여성들에게 근대적인 교육을 통하여 자기 개발과 인간해방을 맛보게 하며, 불운한 여성, 비천한 계층의 여성들이 겪어야 했던 고난과 소외를 사회 참여의 새로운 가능성으로 승화했다는 데에 그 의의가 크다.

또한 당시의 시대적인 상황으로 볼 때 남성들과 여성들이 함께 예배나 집회를 가진다는 것은 용납될 수 없었기 때문에 스크랜턴 대부인은 1888년 1월에 여성들만의 주일학교(Sunday school)를 조직하여, 성경공부를 시작하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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