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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이천 도자기의 유래 조회수 : 3069
  작성자 : 박행신 작성일 : 2004-02-02

지금은 2001년 세계 도자 문화 EXPO를 개최할 정도로 이천도예촌의 도자기는 국내최고의 수준을 자랑하지만 이천 도자기의 역사는 50년을 넘지 못한다. 선사시대나 삼국시대 때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는 무문토기 등 선사토기편들이 간혹 출토되기는 하나 관요가 있었던 인근 광주군이나 여주군과는 달리 이천에서는 고려시대의 자기제작을 뒷받침할 만한 역사적 흔적이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다.

다만 중종25년(1530)에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을 보면 이천도호부의 특산품으로 백옥과 함께 도기를 꼽고 있어 조선시대에 와서는 비교적 활발한 자기제작이 이루어져 왔음을 알 수 있다.

자기생산과는 별도로 60년대까지 신둔면 수광리와 백사면 조읍리의 점말이나 장호원읍 노탑리 등에서 명맥을 유지해온 옹기가마 는 이천도예촌의 형성기반을 제공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특히 신둔면 수광리 지역은 당시 「대단히 건실한 솜씨인 칠기(漆器)제품이 만들어졌다」는 기록이 전해져 내려올 만큼 칠기솜씨가 상당한 수준이어서 50년대 말부터 태동기에 접어든 이천지역 현대전통도자기 발생에 결정적인 역할을 제공하게된다.

신둔면 수광리와 사음리를 중심으로 3백80여개에 가까운 요장들이 밀집된 도예 마을이 이루어지게 된 배경에는 위에서 언급한 수광리 칠기 가마의 존재가 촉매 구실을 했다.

조선조말 이웃 광주군 분원에 자리잡고 있던 관요(官窯)가 문을 닫고 민간화 되면서 관요에서 고급 백자를 만들던 도공들이 지방가마로 흡수되어 품질이 거친 막사기를 대량생산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일부는 가까운 이천으로 유입 됐을 가능성이 높다.

특히 일제시대 일인들이 운영하는 도자기 제작소에서 기술을 익히거나 근근이 밥벌이를 해온 도공들이 50년대 후반부터 수광리로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하면서 이천 도자기 발생의 중심인물들이 됐다.

이때 한국 미술품 연구소에서 활동 하던 고명순. 김완배. 지순탁 등이 일할 곳을 찾아 수광리 칠기가마로 내려오게 되고 이들을 따라 윤석준. 박수만, 현무남 등 젊은 도공들 이 합류했으며 이듬해에 유근형도 수광리에 정착하게 된다.

이들과 수광리 칠기가마에서 일 하고 있던 홍재표. 이정하. 고영재등 칠기장인들이 한데 뭉치면서 이천 도자기 시대의 막이 오르게 된다. 홍재표는 지순탁. 고영재와 손을 잡고 부친이 하던 칠기가마 자리에 수금도요를 열었으며 이곳에 현무남. 김홍준.서인수. 이종열 등이 가세했다.

1965년 한일협정 체결을 계기로 일본인들이 한국방문이 자유로워지자 갑자기 일본인들에 의한 전통도자기의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게 되고 따라서 생산도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이즈음 지순탁은 고려도요 를 설립해 독립했고 고영재는 방철주와 손을 잡고 동국요 공장장으로 나갔으며 수금도요는 당시 재일교포로 일본을 왕래하던 조소수에게 넘어가 광주요로 바뀌었다. 유근형은 1960년 고승술의 칠기가마를 빌어 아들 유광렬과 함께 해강 고려청자 연구소를 설립했다.

이처럼 이천 도예촌이 짧은 기간동안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일본인들의 막강한 구매력이 큰 몫을 담당했다. 국내에서는 관심조차 기울이지 않았던 60-70년대에 이천도자기의 전통과 우수성을 인정해준 것은 일본인이었고 또 일본시장이 거의 유일한 소비창구가 되었던 것이다. 단기간에 형성된 이천 도예촌은 75년 이전까지는 요장이 불과 9개소에 불과했으나 80년대. 90년대를 거치면서 3백80여개를 헤아리는 대규모 도예단지로 성장, 대표적인 도자기 생산지로 명성을 쌓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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